겨울이 되면 도시는 한결 조용해지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어든 자리에는 오래된 풍경들이 남습니다. 그 고요한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화가가 있습니다. 화려한 장면이나 이상적인 세계보다, 자신이 살아온 현실과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했던 화가, 손상기 화백입니다.
손상기 화백은 1949년 전라남도 여수의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불편했고, 성장 과정 내내 병마와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구루병으로 인해 척추가 굽어 있었고, 이후에도 폐결핵 등 여러 질병을 앓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체적 조건은 그를 그림에서 멀어지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원광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서 수학하며 본격적으로 미술의 길에 들어섰고, 1970년대 중반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76년 구상전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고, 1981년 첫 개인전을 열며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짧은 활동 기간이었지만, 그는 꾸준히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손상기 화백의 그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그의 작품 속 도시는 발전과 성공의 상징이 아니라, 개발의 그늘 아래 놓인 사람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특히 1980년대 서울 아현동 달동네를 그린 ‘공작도시’ 연작은 그의 작품 세계를 대표합니다.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 정리되지 않은 골목, 무거운 하늘 아래 놓인 풍경은 당시 도시가 품고 있던 현실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의 그림에는 웃음도, 희망을 강하게 말하는 장면도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침묵에 가까운 정서가 화면 전체를 채웁니다. 인물이나 건물은 왜곡되거나 과장된 형태로 그려지지만, 그것은 표현을 위한 장치일 뿐 감정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화면 속에는 늘 무게가 있고, 그 무게는 작가 자신이 살아온 시간과 닮아 있습니다.
손상기 화백은 흔히 ‘한국의 로트레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신체적 결핍과 사회적 시선 속에서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주변부의 삶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런 비교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누구를 닮기보다는 철저히 그의 삶에서 출발한 결과물입니다. 자신의 조건을 숨기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채 화면에 옮겼다는 점에서 더욱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그는 1988년, 마흔을 채 넘기지 못한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흔적이 되었습니다. 생전에는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그림은 점점 더 많은 이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손상기 화백의 작품을 마주하고 있으면, 그림 속 풍경이 과거의 특정 장소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도시의 어딘가에는 여전히 비슷한 삶의 모습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은 도시를 비판하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게를 조용히 바라봅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의 그림을 떠올리면, 도시는 조금 다른 얼굴로 다가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풍경 너머에 남겨진 자리들, 그리고 그곳을 지켜온 사람들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겹쳐집니다. 손상기 화백의 작품은 그렇게 우리가 외면해왔던 현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고, 예술이 무엇을 기록할 수 있는지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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